“러브크래프트 서클”은 H. P.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불숨(Vulthoom)은 그레이트 올드원 또는 외계 신(아우터 갓)으로도 분류되는데, 크툴루 신화에서 이런 분류의 혼란은 빈번합니다. 크툴루 신화 체계가 지닌 태생적 한계로 분류의 기준뿐 아니라 족보까지 꼬이는 건 예사인데요. 스미스의 창조물인 불숨은 화성인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적인 악마 신입니다. 화성 원주민은 아니고 미지의 다른 행성에서 화성으로 망명한 존재인데요. 생김새는 주홍빛 꽃을 연상시키고, 완벽한 대칭미를 지닌 요정까지 신체의 일부를 형성하는 등 가공할 능력과 잠재된 포악성을 감안하면 의외로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물론 이것이 실물이라기보다는 대리자의 이미지에 가깝긴 합니다만.
불숨은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지하세계, ‘라보르모스 Ravormos’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합니다. 불멸에 가까운 수명으로 천년 주기 다시 말해 천년을 잠들고 천년을 깨어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데요. 화성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된 불숨은 또 다른 행성 즉 지구로의 이주를 꾀합니다. 화성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지구 도착 전에 미리 이미지 관리도 하고 우호적인 지지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는데요. 이런 사전 작업을 해줄 지구인들이 필요한데, 화성에서 미아 신세로 방황하던 두 지구인, 헤인스와 챈러가 불숨의 예비 사절단으로 포섭됩니다.
「요봄비스의 지하묘」, 「심연의 거주자」를 잇는 스미스의 화성 삼부작 마지막이 「불숨」인데요. 화성 연작은 총 4편, 이중에서 「화성의 실생식물 Seedling of Mars」(「행성 존재」로도 출간된)을 제외하고 크툴루 신화와 관련된 세 편을 보통 스미스의 화성 삼부작이라고도 한다죠. 화성 삼부작의 전작들처럼 화성의 지하세계가 배경입니다. 불숨이 마취성 향기를 발산하여 상대를 제압하고 포섭하는 것도 「심연의 거주자」와 유사합니다. 다만 전작인 「요봄비스의 지하묘」, 「심연의 거주자」와 비슷한 것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불숨」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스미스 특유의 시적인 상상력이 빚은 매력적인 부분들이지만, 이것을 한데 작품 속에 녹이는 과정은 어딘지 전작들에 비해 느슨한 느낌이 듭니다. 정적인 묘사의 비중이 더 큰 것도 이유겠으나, 독자들에 따라 여러모로 호불호가 갈릴 듯 합니다.
표지
불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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